"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최승자 시집, 문학과 지성사.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안다는 것.
점점 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를 읽으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비록 시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라도.
'시'는 다른 문학과는 다른 감동이 있다. '젊음'이랄까, '청춘' 같은 단어들이 녹아 있다.
특히,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 은 치열하다.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일기』도 좋았지만, 이 책을 추천하게 된 건 아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치열하지 않은 우리의 청춘을 함께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처음에 이 시집을 접했을 때. 조금 당황했었다.
아니 '시'라는 것, 교과서 밖의 '시'를 접했을 때의 느낌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적나라하고 과격한 언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
내가 알고 있던 '시'라는 것의 정체성이 깨어지는 순간, 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사랑』은 생존과 미래를 다투며 싸우는 바로 나의 이야기 였다.
어느 시대고, 젊음은, 그 치기와 열정, 치열함은 다르지 않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위로받았다.
아픈 곳을 찌르고 찌르며 더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삶과 죽음, 사랑, 그 모든 것들을 바닥까지 추락시키는 그 언어들.
모두 '이 시대의' 모든 청춘들이 느끼는 그 고통의 무게가 아닐까.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일찌기 나는」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자화상」
나의 존재, 근원 등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을 만하다.
'난 어떻게 태어났을까'부터 '삶' 혹은 그것의 '의미', '존재의 필요성' 등등.
자아와 일상의 괴리의 인식은 끝없는 부정을 낳는다.
"루머"처럼 존재하는 나.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는 "긴 몸뚱어리의 슬픔"
이러한 철저한 부정 끝에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일까.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네게로」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겨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여자들과 사내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무도 자유로와 쓸쓸한 세상
너무도 자유로와 무서운 세상
너무도 자유로와 버림받는 세상
아무도 나의 사랑을 받지 않아요
때로 한두 푼의 동전
시들은 장미꽃을 던저 주지만
아무도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지 않아요
「슬픈 기쁜 생일」
만인의 공통 주제어 '사랑'. 최승자 시인의 시에는 '사랑'을 다룬 시가 많은 것 같다.
실패한 사랑의 경험들은 "쇠꼬챙이처럼" 나의 감수성을 헤집어높았다.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내고, "쇠꼬챙이처럼" 나를 찌르는 목소리, 그의 말.
그럼에도 찔린 몸으로 그의 곁으로 가서,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죽고 싶다는 마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감정, 이별 후 또는 이별을 감내하고 있는 동안의 감정은
마치 유행가의 가사가 모두 나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픔은 헤집어 더욱 아프고 나서야만이 치유될 수 있다는 나의 믿음과 일맥 상통하는 느낌이었다.
우울할 때 우울한 노래를 들으며 슬픔을 즐긴다면, 아마도 그녀의 시와 잘 맞을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사랑, 혹은 이별은 '배고픔'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한다'는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의 시구가 인상깊게 남은 탓도 있겠지만,
'배고픔' 즉, '원초적 본능'의 욕구 앞에서 '이별의 슬픔'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배고픔의 욕구 해소의 과정은
삶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지만, 의지 없는 삶이라는 모순적 의미가 녹아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누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것?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할 수 있을까.
내 허약한 유리창으로
저 검은 물결을 막아낼 수 있을까
나의 정신과 몸뚱이 속으로
이입해 들어오려고
창밖에서 파도처럼 뒤끓고 있는
밤의 기류를.
「밤」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청계천 엘레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때
서른 살은 온다.
「삼십세」
삶 속에서 느껴지는 무수한 감정들.
삶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기에 그 모든 것은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 쓸쓸함, 공허함, 허탈함…
자유를 꿈꾸지만,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뭍혀"버린 일상.
언제든 나를 부수고 들어오려는 어둠, 밤, 차가운 현실.
그리고. 이미 지나쳐버린 과거와 닥쳐버린 지금.
과거를 살아왔고, 현재를 살고 있고, 미래를 살아갈 우리.
삶, 그 속의 일상, 파편들을 지배하는 정신을 우리는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굴레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숨을 쉬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타인에게 받아들여 지는 것?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독하리만치 고독한 우리의 존재와
순간마다 눈을 뜨는 끔찍한 고통, 아픔, 슬픔의 감정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때,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때야말로 '삶'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