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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리뷰♥/책읽기 2010. 3. 28. 18:17
가토다이조 지음 · 이인애,박은정 옮김
고즈윈
서점을 거닐다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됐다. 평소 '눈치를 많이 본다' 혹은 '눈치가 빠르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때문일까, 이 책을 통해 내 심리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읽어가면서 ‘아, 나도 이런데’하는 생각이 들어 저자의 생각에 자꾸 동의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상황에 맞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일반적인 경향에 기대 쓴 책이라 그런지 약간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어찌됐건 나는 내 상태를 상당히 많은 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악했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 마음이 왜 이런지, 내가 어떤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는지 예전부터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의 확인일 뿐이라는 것 역시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라는 명목으로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에 대한 내가 동의할 수 있는 해답을 간추려보았다.
관계가 뒤틀린 채 헤어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상대를 잃는다는 뜻이다. 애정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사람에게 상대를 잃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런 까닭에 이미 뒤틀린 관계 속에서 상대에게 집착하며 만신창이가 되어 간다. 헤어지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자신의 성장을 위해 과감히 상대에게 이별을 고할 필요가 있다.어렵지만 이제는 내가 애정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애정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사람’의 특성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모든 사랑(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에 대한 이별에서 만신창이가 될 만큼 나를 망가뜨리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자기 성장을 위해 과감히 이별을 고해야 한다지만 그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과감성’ 그것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이지만 아무도 그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어떤 방향으로 과감해질 것인가?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남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며 믿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그런 감정을 애써 외면한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한 감정을 남에게 투사한다. 요컨대 남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도 왠지 믿을 수가 없다.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사람도 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싫어하며 그 감정을 외면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사회적으로 명예를 얻고 사람들의 호의를 접해도 남의 말을 믿지 못한다. 겉으로는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여도 마음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까닭에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감정에 가깝다. 누군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할 때 당신의 결점까지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결점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당신의 싫은 점에 불과하다. 결코 결점 때문에 당신을 싫어하게 되지 않는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에게 만족해한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자신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흡족해한다는 뜻이다.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가 단지 자신과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는 것에 왠지 위화감을 갖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상대가 지금 이대로의 나를 좋아한다고 믿으려 해도 왠지 자신이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좋은지 마음 한구석이 못내 불안하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비록 내게 결점이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 또한 내게 만족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숨겨진 의존성이 있는 여성은 때로 매력 있고 호감 넘치며 성실한 남자를 뿌리치고, 매력 없고 교활하며 비겁한 남자를 믿는다. 그리고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버림받는다. 그리고는 뒤늦게 '속았다'며 한탄을 한다. 속은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원한 것이 바로 남자의 달콤한 거짓말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내 입장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 전에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대답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나에게 만족할 수 없다. 그러니 누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나는 항상 사랑받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내가 사랑받은 적이 없는 것(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사실이 아닌 나의 의견 혹은 믿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믿음의 벽을 치고서는 나에게 다가서려는 사람들을 모두 밀어내버린 것일지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하면서 상대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는, 모순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맑은 날은 맑은 날이라서 좋다. 또는 맑은 날이라서 나쁘다. 사실 맑은 날은 그저 맑은 날일 뿐,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흐린 날은 흐린 날일뿐이고,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일뿐이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을 왠지 기분이 나쁘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비가 오면 마음으로 먼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나쁘다는 마음속의 현실상을 따라 느낀다. 왜 자신의 실제 감정대로 느끼지 못하는가? 괴로움을 시인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두려운 것인가?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공포란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무관심은 자기방어다. 이제 더는 이런 식으로 살 수 없다는 신호다. 스스로 감정을 억압하며 살아온 결과다. 지루해서 더는 참을 수 없으면서도 즐겁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억압이 계속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무관심 혹은 무기력. 중학교 때인가, 문득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이 쉽게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감흥을 가지지 못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시나 소설을 읽을 때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꼭 필요한 영역 이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감정이 없는 사람인 듯한.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 즉 1차적 관심영역에 대한 태도는 물론 다르다. 하지만 그 밖의 영역에 관해서는 ‘무관심’했다. 지금도 별다르지 않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영역은 극히 협소하다. 이것은 나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바뀌지도 않는다. 관심 없는 일에 억지로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
자기방어. 참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나를 이런 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구나, 조금은 안심이 됐다. 물론 이것만으로 나의 그간의 모든 무관심에 대한 해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이용해 지금의 무관심 혹은 무기력 상태에 대한 합리화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음이 기쁠 뿐이다. 여전히 이 무관심을 벗어나는 방법은 잘 모르겠으나 일단 문제점을 파악했으니 해결책을 찾는 길은 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감정대로 느끼는 것,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살갗위로 쏟아지는 햇살과 우산위로 떨어지는 후두둑 소리를 마음으로 느끼고 싶은 것이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 언젠가부터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 그것을 다시 찾고 싶은 것이다.부모에 대한 자신의 실제 감정을 깨닫는 것은 분명 심리적 독립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 감정을 깨닫는다고 해서 자율성을 손에 넣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자율성을 키워가는 일은 또 다른 작업이다. 실제 감정을 깨닫지 못하면 의존성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자신이 의존적임에도 애정이 두터울 뿐이라고 여기므로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깨달은 것만으로 마음을 놓고 있다면 이는 의존 대상을 바꿨다는 의미밖에 안 된다. 부모에게 벗어난 대신 자신의 배우자에게 의지한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결국 대상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다.
애정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자신의 마음을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알코올중독자가 몸을 소중히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점을 깨달은 사람은 먼저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자신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너그러워진다는 뜻이다. 다정한 어머니가 나를 대하듯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일이다. 스스로 이해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는 일이다. 절대 자기 자신에게 비판적이어선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너그럽게 대할 것, 자신을 잘 도울 것, 자기 자신에게 어리광을 허락할 것, 자신을 잘 보살필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결국 나를 바꾸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오래전에 의존성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의존하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 누군가에게 자꾸 기대고 싶어 하는 욕구가 남았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으니, 또는 기대지 못했으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걸고 기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부담을 주고 집착했던 것 같다. 나를 짊어지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 자신조차 소중히 하지 않는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길 원했었다. 그 누가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길 바라기 전에 스스로 나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스스로에게 미움 받았던 나에 대한 약간의 보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않는다면 허전하긴 하겠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내가 있다면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위하면서 그렇게 ‘당당한 여자가 되자’는 신조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결국 하루하루 나를 다독이고 보살피는 것은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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